7월, 2023의 게시물 표시

에티오피아의 문화유적 샤베(Chabbé), 멜카 쿤투레(Melka Kunture), 티야(Tiya)

이미지
샤베(Chabbé) 유적 에티오피아 아디스아바바 남쪽 260km 지점에 위치한 광활한 대초원에 있는 폭 5~10m의 깊은 협곡이다. 현지 주민들은 이 협곡이 오랫동안 동굴이었다고 말하며, 실제로는 천연의 지붕같이 생긴 암석 파편들이 흩어져 있어서 한때 이곳이 일종의 굴이었음을 알 수 있다. 협곡의 벽에는 소를 우아한 양식으로 묘사한 돋을새김들이 약 50개 정도 있다. 이 조각들은 송아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암소들로서, 옆에서 본 몸의 형태와 뿔은 정면에서 본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이러한 조각들은 주로 가축들의 다산제(多産祭)를 치르던 곳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조각들의 나이를 알려주는 퇴적층도 매우 오래된 것으로 보인다. 멜카 쿤투레(Melka Kunture) 유적 에티오피아 아디스아바바 남쪽 50km 지점의 아와시강 유역에 위치한 유적지이다. 1963년 아와시강 강둑 여러 곳에서 고대인들이 살던 거주지의 유적들이 발견되었다. 이 지역은 수천 년 동안 사람들의 주거지로 사용되다가, 떠날 때는 생활용구들을 유물로 남기고 떠난 흔적이 있다. 하지만 우기에 범람한 강이 진흙으로 유적지를 뒤덮어버려서 과거의 일부가 진흙 아래에 묻혀져 있다. 멜카 쿤투레에는 원시 시대의 주민들의 유적이 발견되어, 그들이 돌과 돌을 부딪쳐 깨뜨린 다음 그 도구를 이용해 물건을 자르고 깎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 지역의 넓이가 100㎡ 정도인 타원형 토대 위에는 이러한 형태의 도구와 돌조각들이 어지럽게 널려있다. 또한 한 구석에 610개의 돌로 만든 작은 원(圓)들이 5개가 발견되었는데, 이들은 어떤 목적 아래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이들이 오두막을 세울 때 기둥을 받쳐주는 쐐기였을 가능성으로 제기된다. 티야(Tiya) 유적 에티오피아 아디스아바바 서남쪽 250km 지점의 소두 부근에 위치한 지역으로, 이곳에서는 수많은 고고학적 수수께끼 중 하나인 비석들이 발견되었다. 높이가 5m 가량 되는 비석은 크로 평평한 석판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콜롬비아의 「산아구스틴」 유적과 이집트의 「아바리스와 타니스」의 유적

이미지
  콜롬비아의 「 산 아구스틴 」 유적 산 아구스틴은 콜롬비아 보고타 서남쪽에서 약 400km 지점에 위치한 조그마한 마을이다 . 이 마을은 안데스 산맥 속에 자리하며 , 한 시간 정도 걸어가면 습지의 밀림 속에 300 개가 넘는 대형 석상 ( 石像 ) 들이 몇 km 지역에 걸쳐 세워져 있다 . 이 석상들은 사람의 얼굴에 고양이 이빨을 한 무서운 모습을 띠고 있으며 , 높이가 4m 나 되는 석상들도 존재한다 . 그 중 일부 석상들은 안고 있는 아이들을 잡아먹는 듯한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다 . 산 아구스틴 지역에는 석기시대의 사원과 무덤의 유적들도 발견되며 , 이 사원들은 이미 오래 전에 땅속에 묻혀져 입구만이 외부에 노출돼 있다 . 이곳의 돌에 그려진 그림들은 남아메리카의 다른 지역에서 발견된 그림들과는 다르게 정사각형 , 직사각형과 같은 기하학적인 도형들로 이루어져 있다 .  이러한 그림들이 여러 번 되풀이되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일종의 문자인 것으로 추측되기도 하지만 , 제문이나 주술 ( 呪術 ) 적 무늬일 수도 있다 . 알토데라바파타스에서 발견된 기묘한 유물은 하천 바닥에 둥근 바위들을 늘어 놓아 작은 못 모양의 수로 ( 水路 ) 들을 연결시킨 것으로 특이한 형태를 보여준다 . 이 수로들은 사람의 모습과 파충류 , 개구리 같은 물가에 사는 동물들의 조각들로 장식되어 있다 . 그러나 이 기묘한 유적이 정확히 어떤 용도로 사용되었는지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미스테리한 상태이다 . 추측에 따르면 , 이곳은 사람을 치료하던 장소나 희생의 제물로 바치는 의식이 행해졌던 곳으로 보인다고 한다 . 탄소 -14 측정방법으로 산 아구스틴의 연대를 측정한 결과 , 이 유적은 BC 6 세기경에 세워진 것으로 나타났다 . 이 지역에는 도시가 존재한 흔적이 전혀 없기 때문에 이곳은 순례지로 여겨지고 있다 . 그러나 이곳을 다녀간 사람들에 관해 알려진 것은 아무것도 없어서 이유나 목적에 대한 밝혀진 사실이 없...

중국의 「석채산」(石寨山)의 유적 이야기

중국의 「석채산」(石寨山) 예전, 중국 운남성(雲南省), 곤명(昆明) 남쪽 48km 떨어진 곳에 석채산(石寨山)이라는 지역이 있었다. BC 329년 경, 중국의 한 장군이 운남(雲南)에 있던 전(愼)왕국을 정복했다. 그러나 고국으로 돌아가는 길이 다른 제후(諸侯)들의 군대로 막혀버려서 그 장군은 운남에 머물게 되었고, 결국 전나라의 국왕이 되었다. 이 장군의 부하들은 이 지역에 중국문화를 전파하게 되었다. *제후(諸侯) - 중국 주(周)나라의 천자로부터 각 지역을 분봉받아 그 지역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던 사람을 일컫는 말. 1955년, 고고학자들이 석채산 지역에 있는 전나라 귀족들의 무덤을 발굴하면서, 중국의 전통문화와 별개로 발전한 이 문화에 대해서 알게 된다. 무덤 속에서는 죽은 사람과 함께 매장된 부장품들이 많이 발견되었다.  이 유물들을 분석한 결과, 이 지역에는 청동기 문명이 존재했으며 그 주민들은 철을 사용할 줄도 알았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들이 가지고 있던 기술은 중앙아시아 초원지대 사람들의 기술과 연관이 있다. 예를 들어, 이들의 무기에는 얕게 돋을새김한 동물의 그림이 장식되어 있었고, 특히 흥미로웠던 것은 자패(紫貝, 화폐의 일종)를 넣는 그릇으로 사용된 북모양의 청동 용기였다. 이 용기의 머리부분에는 조그마한 그림들이 그려져 있었는데, 그들의 일상생활이나 종교 생활의 모습을 담고 있었다. 그 중 일부 용기에는 여자가 제물을 받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어서 그들의 사회가 여성 지배 사회였을 가능성도 나타낸다. 그리고 또 어떤 용기에는 사람을 희생의 제물로 바치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운남은 7세기 말에 중국에 예속되고, 그 후 쿠빌라이 칸에게 정복되어 식민지가 되었다. 대부분의 주민들이 중국 문화에 동화(同化)되었지만, 일부가 국외로 망명한 것으로 추측된다. 동남아시아와 폴리네시아에서도 청동제 북이 발견되었는데, 이들 지역에서도 고대의식으로 인간을 희생의 제물로 바치는 의식이 거행되었다. 그래서 이들 지역에 운남 사람들...

카나리 제도의 「엘이에로 섬」과 캐롤라인 제도 섬의 「난마돌」 이야기

이미지
  카나리 제도의 「 엘 이에로 섬 」 - El Hierro 카나리 제도의 「 엘 이에로 섬 」 은 카나리 제도의 테네리페 섬 서남쪽에서 약 150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  이미 100 년이 넘도록 , 한 가톨릭 사제가 이 섬의 외진 절벽에 새겨진 문자 모양을 발견했다 . 이 암벽 아래에는 둥근 고리 모양으로 배열된 돌덩이들이 잘라내어 앉을 수 있게 배치되어 있다 . 그 이후로 엘 이에로 섬뿐만 아니라 라팔마 섬과 그란카나리아 섬에서도 글자들이 다수 발견되어 조사가 진행되었다 . 이러한 글자들은 4 가지 다른 종류로 나누어진다 . 어떤 글자들은 유럽의 청동기시대 사람들이 그린 것과 유사하며 , 다른 일부는 사하라 사막의 바위 조각이나 크레타 문명의 문자와 비슷하다.  이것은 카나리 제도에 고대로부터 다양한 외래인들이 다녀갔음을 시사하기도 한다 . 그러나 이러한 유적들도 프랑스와 스페인 사람들이 이곳에서 발견한 구안치족의 기원을 밝혀내지 못하고 있다 . 구안치족은 유럽에서 북아프리카로 이주한 크로마뇽인 종에 속한다고 여겨지며 , 유럽에서 발견된 훌륭한 동굴화는 크로마뇽인들이 예술적인 재능을 가진 예술가들이었음을 보여준다 . 하지만 카나리아 제도에서는 그러한 그림들이 발견되지 않았다 . 캐롤라인 제도의 「 난마돌 」 - Nan Madol 캐롤라인 제도의 「 난마돌 」 은 캐롤라인 제도의 뉴기니아 서북쪽에서 약 2100km 떨어진 포나페이 근해에 위치한 섬이다 . 이 섬에서 가장 접근하기 어려운 지역에는 인상적인 석기시대 마을의 유적이 있다 . 높이 약 9m 에 이르는 거대한 현무암 덩어리들이 벽을 이루고 있으며 , 이곳은 뛰어난 솜씨로 조각된 곳으로 형성되어 있다 . 미크로네시아 사람들로서는 이런 정도의 건축물을 만들어 낼 능력이 없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이 도시는 해협과 비슷한 수로망에 의해 여러 작은 섬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 한때는 바다로 통하는 운하와 연결된 개폐식 수문과 방조...

브라질의 「파코발」 유적 이야기

이미지
브라질의 「파코발」 아마존 삼각주의 마라호 섬에 자리잡은 파코발는 안데스 문화의 특징을 보여주는 발달된 문명의 유적지이다. 약 60여개의 인공 언덕이 있으며, 이 언덕들은 홍수나 만조 때 바닷물의 수위가 닿지 않도록 만들어져 있다. 이 중 일부는 무덤으로 사용되었고, 다른 언덕들은 마을 터로 사용되었다. 발굴된 토기류는 정교함으로, 가장 오래된 것은 약 1300년 전으로 추정된다. 특히 여성의 음부 모양을 형상화한 토기들이 흥미로운 발견 중 하나이다. 이 문화는 1450년 이전에 소멸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 이유는 포르투갈이 이 지역을 식민지로 만들 때, 미개한 인디언들만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불분명한 인디언 부족이 아마존 유역에 일시적으로 정착한 것으로 보이며, 그들은 토목 기술과 철저한 계급사회를 형성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그들이 이곳에 온 이유와 떠난 이유는 여전히 알려지지 않았다. 기후적인 이유로 인해 이곳에서 살아남기 어려웠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카리브해의 안틸제도로 이동한 것으로 보인다.

<바레인> "칼라트 알바레인" 유적 이야기

이미지
  칼라트 알바레인 (Qal’at al-Bahrain) 바레인의 "칼라트 알바레인 (Qal’at al-Bahrain)" 유적지는  바레인섬 북쪽 끝에 위치해 있으며 오랜 역사와 풍부한 유적들로 유명하다 . 이곳은 무려 10 만개에 달하는 크고 작은 무덤들로 가득 차 있어서 ' 죽은 자의 섬 ' 이라고 불린다 . 과거에는 이슬람 문명이 나타나기 전 아라비아 동부해안에 살던 주민들이 죽은 자들을 이곳으로 옮겨 묻었다고 알려져 왔다 . 그래서 대부분의 사막으로 둘러싸인 이 섬에는 선사시대의 도시나 사원 , 궁전 같은 건축물들은 없었다고 여겨졌왔다 . 그러나 최근의 발굴 작업에서는 도시의 주택 , 담벽 , 그리고 양식을 알 수 없는 궁전과 성소들이 발견되었다 . 이를 통해 바레인은 예전에는 사라진 제국의 중심부였으며 , 그 세력은 현재의 사우디 아라비아까지 미치는 규모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 바레인은 고대 수메르인들이 묘사한 태양의 나라로 , 노아의 홍수 이후에도 살아남은 지상 낙원의 중심지였다 . 발굴된 유물들은 바레인이 인도 및 메소포타미아와의 상업활동을 수행했음을 시사한다 . 예로부터 바레인은 지하수로를 통해 생물들을 끌어올려 농경지에 물을 공급하기도 했다 . 현재 바레인에서 진행 중인 고고학적 조사 작업은 아직 초기 단계이지만 , 아라비아해안과 부근의 섬들에서는 이와 동일한 문명의 흔적들이 발굴되고 있으며 , 그 중에서 바레인에서 발견된 것보다 훨씬 오래된 유적들도 있다 . 그러나 이 문명의 발생시기를 확인할 수 있는 결정적인 유적지는 발굴이 불가능한 상태이다 . 이유는 해당 유적지가 여성들이 목욕을 즐기는 장소에 위치하여 아라비아의 관습상 엄격히 출입이 금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 이 유적지의 표면에서는 BC 4000 년의 토기 파편 , 부싯돌 , 그리고 흑요석 칼 등이 발견되었다 . 이 해가 뜨는 나라의 문명사는 곧 고고학자들에 의해 정확히 밝혀질 것으로 기대된다 . 현재로서는 바레인이 세계에서 가장 오...

<알제리> 아발레사의 ‘투아레그족’과 ‘틴 히난 공주’의 전설

이미지
‘투아레그족’과 ‘틴 히난 공주’의 전설 알제리(Algeria) 타만라세트(Tamanrasset) 서쪽 54Km 지점에 위치한 아발레사(Abalessa)의 투아레그족들은 자신들이 전설속 인물인 베르베르인 공주 틴 히난의 후손이라고 주장한다. 프랑스의 고고학자들은 '틴 히난 공주'의 유해가 아발레사 마을 인근 무덤에 있다고 하는 이들의 말에 대해서 1925년 확인에 나선다. 고고학자들은 투아레그족이 가르쳐 준 곳에서 직경 24m, 높이 90cm의 둥그런 흙무덤을 하나 발견한다. 그곳을 발굴해 보니 꼼꼼하게 만든 석조(石造) 구조물이 드러났고 내부에는 석실이 여러 개 있었다. 이 구조물은 이슬람 문명 이전의 건축양식이었다. 이 구조물의 맨 끝자락에 있는 방에서 키가 173cm의 큰 백인 여자의 유골이 발견되었다. 이 여자는 유럽이나 지중해 혈통이라기보다는 고대 이집트인과 많이 닮았으며, 가죽옷을 입고 오른팔에는 7개의 금 팔찌와 왼팔에는 7개의 은 팔찌를 끼고 있었다. 유골 옆에 놓인 나무 사발 속에는 로마의 동전 모양이 각인되어 있는 금박 몇 개가 담겨 있었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는 둔부가 툭 튀어나온 석기시대 초기의 작은 조각상이 하나 발견되었다. 이 조각상은 고대에 사용된 일종의 우상으로 보였다. 노예들을 묻은 것으로 보이는 14개의 작은 무덤들에 둘러싸인 중심부에 건축물이 있었는데 이 건축물은 묘로 쓰려고 만들었다기 보다는 일종의 요새처럼 보였다. 그렇다면 누가 이 요새를 만들었는가가 의문이다. 「플리니우스」에 의하면 BC 19년경에 아발레사에 온 로마인들이 이 요새를 세웠을지도 모...

알바니아, 말리크의 ‘일리리아족’ 원주민의 역사와 유적

이미지
‘일리리아족’ 원주민 (Indigenous ‘Illyrians’) 알바니아(Albania)의 티라나(Tiranë)에서 동남쪽 92km 지점에 위치한 말리크(Maliq)의 원주민인 일리리아족이 생활했던 모습은 여러 고고학자들에게 많은 의문을 안겨주고 있는 곳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알바니아에서는 선사시대 유적지에서는 여러 차례의 발굴 작업이 이루어졌다. 말리크의 원시 일리리아족의 주거지를 발굴/조사한 결과 그들은 인도 유럽어족이 정착하기 훨씬 이전인 BC 2800년부터 그곳에서 주거지로 정착하며 살고 있었던 것으로 밝혀지게 된다. 말리크 유적지에서는 미케네 문명의 특징을 보여주는 유물들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일리리아족은 미케네 문명과 어떤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말리크에서 나온 토기들은 터키의 아나톨리아 그리고 그리스 북부에서 발견된 유물과도 일부 유사한 점이 있다. 그중에서도 제단에 사용했을 법한 토기로 제작된 기묘한 방울 모양의 작은 제대(祭臺)와 손잡이가 있는 그릇, 그리고 홈이 파인 사발은 이 지역에서만 발견되는 것이 특이한 점이다. 알바니아 해안에는 그리스인들이 정착한 뒤, 그다음에는 로마인들이 정착해서 여러 도시들을 세웠다. 일리리아족 중 일부는 식민 통치하에 순응하며 교역활동과 로마군에 입대하지만 대부분의 일리리아족은 외래인들과 동화되지 않고 산속에 숨어서 살며 최근까지도 극히 원시적인 생활을 이어가게 된다. 말리크 유적지를 발굴/조사한 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