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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숨겨진 보물: 브래튼, 크레이그패드리그, 무사, 실버리 힐 언덕, 스캐러 브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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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브래튼, 크레이그패드리그, 무사, 실버리언덕, 스카라브레이 지역의 숨겨진 유적지들을 소개하고, 각 장소들은 고유한 역사와 신비함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 비밀을 풀기 위해서는 더 많은 연구와 노력이 필요합니다. 브래튼: 윌트셔의 신비로운 말 조각 백마 조각 브래튼은 윌트셔의 웨스트베리 동북쪽 5km 지점에 위치한 작은 마을로, 이곳에서는 백악질 언덕에 새겨진 거대한 말 조각을 볼 수 있습니다. 길이가 무려 55m에 달하는 이 말 조각은 알프레드 대왕이 AD 878년 데인족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새겨졌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이 조각이 알프레드 시대보다 더 오래된 것일 수도 있다고 주장합니다. 켈트족은 말을 매우 좋아하여 다양한 형태로 묘사했으며, 이 지역은 켈트족의 주요 주거지와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현지 주민들은 18세기에 이 조각을 완전히 복원했으며, 지금도 이 유산을 보존하고 있습니다. 크레이그패드리그: 인버네스의 유리화된 성벽 크레이그패드리그는 인버네스 서쪽 2.5km 지점의 고지에 위치한 켈트족의 요새입니다. 이곳의 성벽은 화강암을 고열로 구워 유리처럼 변하게 만든 것으로, 놀라운 건축 기술을 보여줍니다. 이 성벽은 최소한 1300℃의 온도로 구워야 가능하며, 당시 켈트족이 어떻게 이러한 높은 열을 얻었는지는 아직도 미스터리로 남아 있습니다. 이 요새는 타원형으로, 중앙에는 깊이 3m 정도의 움푹 파인 구덩이가 있습니다. 무사: 셰틀랜드 제도의 신비로운 원탑 무사 탑 무사는 러위크 남쪽 18km 지점의 셰틀랜드 제도에 위치한 섬으로, 스코틀랜드 북쪽 전역에서 나타나는 일련의 기묘한 유적들 가운데 가장 잘 보존된 원탑이 있습니다. 이 원탑은 높이 13m, 두께 6m로, 안마당으로 통하는 좁은 통로를 통해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곳은 유목민들의 거처였던 것으로 보이며, 누가 언제 쌓았는지는 여러 설이 있습니다. 일부는 석기시대 마을인 스카라브레이를 만든 부족의 후손이

반 치앙 : 태국의 고대 유적지와 그 중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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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은 풍부한 문화유산으로 가득한 나라입니다. 그중에서도 반 치앙(Ban Chiang) 유적지는 기원전 2100년부터 기원후 200년 사이의 선사시대 유적으로, 1992년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습니다. 반 치앙 유적지는 고대 동남아시아의 번성했던 문명들을 밝혀주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유적 발굴의 시작 1966년 8월, 인류학자 스티브 영(Steve Young)과 하버드 미술부 학생들은 졸업 논문을 위해 태국의 반 치앙 지역을 방문했습니다. 스티브 영은 “윌리엄 솔헤임”의 논문에서 이곳에 고대 동남아시아 유적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내용을 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반 치앙의 오솔길을 걷다가 나무 뿌리에 걸려 넘어지면서 진흙탕 바닥에 얼굴을 박게 되었고, 그때 눈앞에 작은 토기 조각이 돌출된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 도자기는 붉고 구워진 도자기로, 원시적으로 만들어진 것을 알아차린 그는 샘플을 채취해 여러 기관을 거쳐 연대측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각종 유물들의 발견 최초의 발굴과 발견 1967년 최초의 발굴이 이루어졌고, 그곳에서는 여러 무덤과 5,000년 이상 된 도자기, 청동 부장품, 탄화된 볍씨 등이 발견되었습니다. 이러한 발견을 통해 이 지역 주민들이 청동기 시대 농부였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연대측정 결과, 기원전 4420년 경에서 기원전 3400년 경의 시대로 나타나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청동기 문화의 유적지로 조사되었습니다. 그러나 1974~5년에 이루어진 발굴조사에서 방사능 연대 측정 정보를 통해 가장 초기의 고분은 기원전 2100년 전의 것으로, 가장 최근의 것은 서기 200년대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발굴된 자료에 따르면 청동기는 기원전 2000년 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곳에서는 각종 장신구(팔찌, 발찌, 귀고리 등)와 막대, 창두, 도끼, 고리, 검날, 작은 종 등 다양한 청동기 물건들이 발견되었습니다. 반 치앙의 고고학적 의미 반 치앙 유적은 선사시대 동남아시아의 시대적 배경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

터키의 하투샤, 아라랏산, 넴루트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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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투샤 (Hattusa) 하투샤는 현재 터키의 수도인 앙카라에서 동쪽으로 약 152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히타이트 (Hittite) 제국의 고대 수도였습니다 . 히타이트족은 고대 이집트와 전쟁과 동맹을 반복했던 아나톨리아의 강력한 제국을 세웠습니다 . 하투샤스는 길이가 6km 에 달하는 거대한 석벽으로 둘러싸여 있었으며 , 이 석벽의 돌 중에는 길이 8m, 두께 6m 에 이르는 거대한 돌도 있었습니다 . 히타이트족은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철을 광범위하게 사용한 민족이었으며 , 출현 배경이 불분명한 귀족 계급에게 복종하는 매우 권위주의적인 사회를 형성했습니다 . 그들이 남긴 수천 개의 글자판 기록은 학자들에 의해 이미 해독되었습니다 . 철기 문화에 기반한 히타이트 제국의 세력은 기원전 14 세기에 중동의 광범위한 지역으로 확장되었습니다 . 그러나 히타이트족은 그들의 세력이 절정에 달했을 때 갑작스럽게 사라졌습니다 . 하투샤는 기원전 1190 년경 약탈과 방화로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 누가 히타이트족을 정복했는지 ,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 있습니다 . 일부 학자들은 히타이트족이 이탈리아에서 에투루리아 문명을 세웠다는 설도 제기합니다 . 또 하나의 기묘한 사실은 하투샤가 약탈당하고 불태워질 때 벽돌집들이 매우 강한 열을 받아 벽돌이 녹아내린 점입니다 . 당시 사용되던 무기와 연료로는 그러한 높은 온도를 발생시키는 것이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 아라라트 산 (Mount Ararat) 아라라트 산은 터키의 수도 앙카라에서 동쪽으로 약 960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습니다 . 노아의 홍수 이야기는 성경에만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 아르메니아의 전설과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바빌로니아의 서사시인 「길가메시 서사시」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 이 전설

태국의 '반 치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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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치앙 (Ban Chiang) '반 치앙'은 방콕 동북쪽 720km 지점에 위치한 태국과 라오스 국경 근처의 지역으로 , 태국의 고고학자들은 이곳에서 기원전 3600 년의 청동기 문명 유적을 발견했습니다 . 그 이전까지는 청동기 제작 기술이 기원전 3000 년경 메소포타미아에서 처음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 이로 인해 메소포타미아인들이 이 지역의 정체 불명의 부족에게서 청동 기술을 배웠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 그렇다면 고대 중동과 극동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었던 것일까요 ? '반 치앙'에서 발견된 청동제 무기와 보석 , 상아 조각품과 도기류는 모두 매우 정교하여 , 이곳 문명이 높은 수준에 도달했음을 증명합니다 . 비록 이 발견이 청동기 문명이 극동에서 유래되었음을 결정적으로 입증하지는 않지만 , 상당히 강력한 증거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 중국에서는 기원전 1300 년경에 , 베트남에서는 기원전 4 세기경에 처음으로 청동이 사용되었습니다 .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청동기 기술이 '반 치앙'에서 주변 지역으로 확산되지 않은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입니다 .

시리아의 '텔 마르디크', '텔 무레이부트'

텔 마르디크 (Tell Mardikh) '텔 마르디크'는 시리아의 알레포에서 남쪽으로 약 70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습니다 . 이탈리아 탐험대는 이곳에서 아직 해독되지 않은 셈어를 설형문자로 새긴 1 만 5000 개의 글자판을 발굴했습니다 . 이 글자판과 다양한 고고학적 유물들을 통해 , BC 2400~2250 년 사이에 이 지역에 강력한 왕국이 존재했으며 , 그 수도가 현재의 텔 마르디크였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 수메르와 아카드 기록에도 이 왕국의 수도에 대한 언급이 있지만 , 이탈리아 탐험대의 발견 이전에는 그 위치와 중요성이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 글자판들이 발견된 장소는 이 도시의 궁전이었으며 , 이 궁전은 오래전에 소실되었습니다 . 당시 이 도시는 인구가 2 만 ~3 만 명으로 추정되며 , 이는 그 시대에 상당히 큰 규모입니다 . '텔 마르디크'의 사회에서는 여성이 중요한 역할을 했고 , 왕비는 두 번째로 중요한 인물이었습니다 . 주요 산업으로는 천 ( 무명 , 비단 ) 과 목재업이 있었습니다 . 많은 글자판들이 아직 감정되지 않았으며 , 앞으로 중동 역사의 새로운 사실을 밝혀줄 가능성이 큽니다. 텔 무레이베트 (Tell Mureybet) '텔 무레이베트'는 시리아의 알레포에서 동남쪽으로 약 80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습니다 . 구석기 시대 유목과 수렵 생활과 신석기 시대 목축과 농업 생활 사이에는 인류학 역사에서 거의 알려지지 않은 오랜 공백기가 존재합니다 . 이 시기 동안 도구 제작 , 종교 , 생활 방식이 모두 변했습니다 . '텔 무레이베트'에서는 약 1 만 1000 년 전 , 즉 신석기 시대 시작 약 2000 년 전의 견고하게 지어진 마을 유적이 발견되었습니다 . 사람들이 이곳에 정착한 이유는 인근에 강이 있었기 때문으로 추정됩니다 . 천연적인 주거지가 없는 이 지역에서 주민들은 나무와 진흙을 사용해 견고한 오막살이를 지었습니다 . 이는 임시 은신처와는 구분되

스위스의 아우그스타 라우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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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그스타 라우리카 바젤 동쪽 10km 지점에 위치한 아우그스타 마을은 고대 로마의 아우구스타 라우리카(Augusta raurica) 요새 성벽 안쪽에 위치해 있었다. 1960년대 초 학교 운동장을 새로 만들기 위해 동력삽으로 땅을 파고 있는 도중에 많은 양의 은제품들이 발굴되었다. 발굴된 은제품들 바젤대학의 루돌프 라우르벨아르트 교수는 이 은제품들을 감정한 결과 AD 4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지금까지 발견된 로마의 은제품들 가운데 가장 중요하고 가치가 있는 것으로 평가를 내렸다. 발굴된 은제품은 모두 257점으로 여기에는 은화, 메달, 접시, 각종 식기류, 장식용 촛대, 비너스 상, 은괴 3개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 은제품은 율리아누스 로마 황제의 것으로 추측되며, 율리아누스 황제는 AD351년에 아우구스타 라우리카를 떠날 당시 소중한 은제품들을 땅에 묻었다가 돌아오지 못하고 되찾지 못한 상황은 아니었을까 추측만이 남아있다.

수단의 메로에(Meroe) 유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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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로에(Meroe) 사람들 고대를 연구하는 문필가들은 나일강 남쪽에 '쿠시(Kusi)'라고 불려지는 부유하고 강대한 왕국 있었다고 한다 . 이 쿠시 왕국의  왕비는 '칸다케-[왕모(王母): 왕의 어머니를 의미하는 ]'라는 칭호를 가지고 있었으며, 때로는 왕을 대신하여 나라를 통치하기도 했었다 . 이집트 사람들은 쿠시족과 비번히 전쟁을 벌였으며 결국에는 쿠시족이 나일강 유역 전체를 정복했다 . BC 715 년에 쿠시족이 건설한 제  25 왕조는 근 1 세기나 지속되었다 . 쿠시족은 '앗수르'가 이집트에 군대를 보내 전쟁을 벌이자 원래 살았던 남쪽으로 되돌아 갔다고 한다 . 메로에(Meroe) 유적지 이들은 이집트의 침공을 받은 후로 보이는 BC 6 세기 때 고대 쿠시 왕국의 수도인 '나파타'를 떠나 더 남쪽으로 내려가 메로에에 자리 잡았다 . 이곳은 철광석이 풍부했으며 메로에인들은 제철 기술이 뛰어난 것으로 유명해졌다 . 메로에인들은 이집트로부터 피라미드를 세우는 풍습을 가져왔으나 현실 ( 玄室 ) 을 피라미드 안에 두지 않고 지하에 구덩이를 파고 시신을 묻었다고 한다 . 이 작은 피라미드들은 지금도 상당수가 남아 있지만 탐사가 이루어진 것은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몇 개에 불과하다 . 이 피라미드들은 유명한 칸다케들의 무덤으로 사용되었는데 이들이 생전 용맹스러운 모습을 조각으로 얕게 새겨져 있다 . 피라미드들에는 또 왕관과 왕족들이 묻혀있다 . 메로에 문자가 새겨진 비문들이 많이 남아 있지만 아직까지도 모든 내용을 해독하기는 어려운 상태하고 한다. 메로에의 외곽

스페인의 유적 - 엘체의 여인 흉상,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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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체의 여인 흉상 (Lady of Elche) 알리칸테 서남쪽 32km 지점에 위치한 엘체 지역에서는  1897 년 이 마을에 살던 한 의사가 그의 정원을 가꾸던 중 땅속에서 여인의 흉상 하나를 발견한다 . 아주 먼  옛날에 조각된 것으로 보여지는 이 조각상은 흉상의 모습만이 있었으며 주변 어디에서도 다른 유물이나 사람이 살았던 흔적들을 전혀 찾아 볼 수가 없었기에 이 흉상의 연대를 추정할 수가 없었다 . 이 흉상이 달고 있는 보석들은 고대 그리스나 로마시대의 것과도 생김새가 다르고 먼 미래 서 고트왕국시대 때의 것과도 닮은 곳이 전혀 없었다 . 그러나  이 흉상은 카르타고인들이 만들었을 가능성이 있었다 . 왜냐하면 한니발의 아버지인 하일카르 바르카가 그의 함대에 쓸 밧줄을 만들기 위해 아프리카나래새라는 풀을 채집한 곳이 바로 엘체 지방이였기 때문이다 . 이 지방 사람들은 아프리카인들과 관계를 유지했던 것이 분명하다 . 이 흉상은 그 양식으로 보아 BC 4 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때는 스페인에서 카르타고인들이 세력을 확장했던 시기이다 . 엘체의 여인 흉상 (Lady of Elche) 이 엘체의 여인 흉상의 등은 약간 굽어 보이는 모습을 하고 있는데 아마도 이 여인이 달고 있는 보석들이 꽤나 무겁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 그리고  이 흉상의 등 쪽에는 구멍이 하나 뚫려 있는데 이 흉상은 어딘가에 걸어놨을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어쩌면 흉상은 분묘함 또는 성스러운 물건을 보관했던 것은 아닐까하는 의문들은 있지만 추측만으로는 이 미스터리한 흉상의 존재는 풀리지 않고 있다 .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은 이 흉상을 발굴해 낸 의사에게서 구매해 전시했다 . 그러나 1941 년 스페인 정부는 자신들의 유적을 되찾으려 값비싼 그림 몇 점과 교환하였으며 현재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에 보관되어 있다 .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 유럽 서쪽끝에 있는 이곳은 인류의 태고역사에 있어 신비한 역할을 했던 곳으로 보인다 . 산타아고데콤포

캐나다의 '쿠주아크' 유적지

 캐나다의 「쿠주아크」 퀘벡 북쪽 1200km 떨어진 웅가바만에 위치한 쿠주아크(Kuujjuaq)는 AD 500년경에 세워진 거석 구조물로서 고고학자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돌담과 돌덩어리를 사용해 건설된 이 거대한 구조물들은 어떤 면에서는 조상(彫像)의 형상처럼 보이는데 아이러니한 것은 이 지역에서는 해당 구조물의 건축에 사용된 바위 근원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이 거석 구조물들은 다른 곳에서 가져온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현재 이 지역에 살고 있는 에스키모족의 문화와는 관련성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에스키모족의 전설에 따르면, 이 거석들은 에스키모족과는 다른 말을 사용하고, 진흙으로 집을 짓고 살았던 거인(巨人) 부족에 의해 세워졌다고 한다. 일부 사람들은 이 정체를 알 수 없는 거인 부족이 노르웨이에서 온 바이킹의 먼 조상이라고 믿고 있다. 또 다른 주장으로는 북아메리카에서 도시 문화를 일으킨 사람들이 웅가바만에 정착했을 수도 있다고도 생각한다. 하지만 아직 이러한 주장들을 뒷받침할만한 충분한 증거는 없어서 풀리지 않는 의문만이 남아있다.

사우디아라비아 - 마다인 살리(Mada'in Salih)의 성소 카바(Kaaba) 신전

마타인 살리(Mada'in Salih)는 사우디아라비아(Saudi Arabia)에 위치한 도시로, 리야드(Riyadh) 서북쪽 약 960km 지점에 자리하고 있다. 카바(Kaaba) 신전은 메카의 성소이다. 이 신전 외벽 동쪽 모서리에는 모든 회교도들이 숭상하는 흑석(黑石)이 있다. ‘검은 돌(al Hajar al Aswad)’ ‘검은 돌(al Hajar al Aswad)’ 구글 이미지 링크 이 ‘검은 돌(al Hajar al Aswad)’은 아마도 운석인 것 같다. 이 검은 돌은 아담과 함께 낙원에서 떨어졌으며 한 천사가 아브라함에게 준 것이라는 전설이 있다. 당시에는 흰 돌이었으나 이 땅에 내려오면서 인간의 죄와 맞닿으며 검은 돌이 되었다고 전해 내려온다. 다만 실제 역사 기록상으로는 서기 400년 이후에나 등장한다. 참고로 이 검은 돌의 정체는 아직 확실진 바는 없지만 운석이 충돌하여 방출되는 엄청난 고열로 인해 지구의 암석이 녹았다 굳어져 만들어진 텍타이트(Tektite) 광물일 것이라는 가설에 신빙성을 두고 있다. 이 돌은 공개만 되었지 아예 꺼내질 않아서 분석이 불가능하다고 한다. 이러한 전설은 사막에서 돌을 숭배했던 셈족의 종교의식이 회교화된 것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특히 나바테아인들은 돌을 숭배했던 흔적을 뚜렸하게 남기고 있다. 이들은 원래 아라비아반도 남쪽에 살았지만 북쪽으로 이동해서 아라비아해안과 내륙지방을 잇는 대상무역을 독점하여 큰 부를 쌓았다. 마다인살라에는 거대한 암벽 속을 파서 만든 송서가 있는데 이를 만든 것이 바로 나바테아인들이다. 이 성소의 복도와 방을 따라 깊숙이 들어가면 벽에는 떼어낸 커다란 돌제단이 있는 사원의 끝에 다다른다. 그들은 이 위에다 신에게 제물을 바쳤다. 이 성소 주변에 있는 벼랑에는 가족묘들이 광대한 묘지를 형성하고 있다. 이러한 성소들에는 그와 비슷한 성스런 돌들이 있는데 이중 어떤 것에는 사람들의 이름 비문이 새겨져 있다. 이러한 돌들은 신이 사는 거처로 생각되었다. 이

루마니아의 ‘카시오아렐레’와 ‘타르타리아’

루마니아의 카시오아렐레 루마니아의 카시오아렐레는 부쿠레시티 동남쪽 48km에 위치한 지역으로, 이곳은 선사시대의 마을들이 남긴 유적으로 가득 차 있는 언덕 지역입니다. 가장 깊은 지역에는 10m X 6m 크기의 성소가 하나 발견되었으며, 이 성소의 연대는 BC 3800년 경으로 추정됩니다. 이 성소에는 부서진 두 개의 기둥 조각이 발견되었으나, 현재는 복원 작업이 진행 중입니다. 그러나 이 두 기둥은 원래 성소의 일부가 아니었음이 명확합니다. 이 진흙으로 만들어진 기둥들은 표면에 여러 번 장식용 채색 흔적을 갖고 있으며, 성소의 벽과 흙을 다져 만든 토대에도 채색 흔적이 있습니다. 이 가장 큰 기둥 중 하나의 둘레에서는 그을린 나무 조각들이 발견되었는데, 이 기둥들이 어떤 구조물을 지탱하기 위해 세워진 것인지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 있습니다. 가장 큰 기둥 중 하나에는 서로 붙은 면을 가진 삼각형 7쌍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 7이라는 숫자는 우연이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선사시대의 문화에서 7은 종종 행운과 관련된 숫자로 여겨졌습니다. 그렇다면 이 삼각형 그림 장식과 7이라는 숫자는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었을까요? 혹시 이것이 달력과 관련이 있었을 것인지, 어떤 성스러운 목적으로 세워진 것인지에 대한 질문은 아직 미스터리로 남아 있습니다. 루마니아의 타르타리아 루마니아의 타르타리아는 부쿠레시티 서북쪽 350km 지점에 위치한 지역으로, 1961년에 흥미로운 발견이 있었습니다. 이곳에서는 테라코타 명판 세 개가 발견되었는데, 이 명판에는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부호들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이러한 명판이 발견된 지층은 약 8000년 전의 신석기 시대로 추정되며, 이 시기는 유럽 대륙에 문자가 나타나기 훨씬 이전의 시기입니다. 이 부호들은 트로야와 메소포타미아에서 발견된 부호들과 유사한 것으로 보이며, 이는 고대 문명 간의 연결을 시사합니다. 타르타리아의 명판은 한 동굴에서 발견되었으며, 이 동굴은 종교적이거나 주술적인 의식에

폴란드의 비스쿠핀(Biskupin)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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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스쿠핀 비스쿠핀은 폴란드에 위치한 도시로, 바르샤바 서북쪽 220km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 도시는 고대 기원전 1000년 동안 존재한 화장묘 문명의 중요한 중심지로서 루사티아 산간지대에서 유럽 북부와 서부로 영향을 미쳤습니다. 비스쿠핀 , 2000 년 ~3000 년 동안 진흙 속에 파묻혀 있었던 목조가옥 도시의 상상도 이 문명은 죽은 사람의 유해를 화장하고, 그 후 유골을 원추 모양의 옹기에 담아 묻는 방식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비스쿠핀은 오랜 세월 동안 흙 속에 잠겨 있었으며, 루사티아에서 비스쿠핀시로 알려진 이 도시는 한때 섬 위에 위치했습니다. 이 도시는 돌과 진흙으로 만든 타원형 벽으로 둘러싸여 있었으며, 주민들은 13줄로 배열된 100채가 넘는 직사각형 모양의 집에서 살았습니다. 이 집들은 참나무와 소나무로 지어져 있었으며, 큰 방과 침실이 각각 하나씩 있었습니다. 겨울에는 길다랗게 튀어나온 현관에서 가축을 키웠습니다. 또한, 타원형 성벽 내부에는 벽을 따라 폭 3m의 길이 나 있었고, 집들을 연결하는 나무 길도 조성되어 있었습니다. 이 도시를 성과 육지와 연결하는 길이도 120m에 달하는 나무로 만든 둑길로 유지되었습니다. 비스쿠핀 주민들은 목공기술과 사회조직이 발달한 것으로 보였지만, 흥미로운 점은 집들의 크기가 모두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 지도자가 없었을 가능성을 고려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들은 해와 달을 숭배하며 어린 아이를 제물로 바치는 종교를 실천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루사티아 사람들의 기술과 사회조직은 유럽의 선사 시대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이들의 문화는 서쪽 지역으로 파급되었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드루이드족이 이러한 지식을 계승했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페루 - 찬찬 도시(peru, AD1000 - chan chan c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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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찬 도시(chan chan city) 리마 서북쪽 480km 지점에 위치한 이 대도시는 과거 치무족의 수도로 사용되었습니다. 이 도시의 면적은 20km로, 직사각형 모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도시는 총 10개의 구역으로 나뉘어 있었고, 각 구역은 2중 또는 3중의 벽으로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출입구는 아주 좁은 문 하나로 제한되어 있었고, 벽 위에는 외부에서만 접근 가능한 길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실로 인해 내부 주민들은 외부에서 감시를 받는 죄수처럼 느껴졌을 것으로 추측되었습니다. 찬찬, 11~15세기 도시 유적의 일부 이 도시는 전성기에는 약 5만 명의 인구가 있었다고 추산되며, 주민들에게 물을 공급하기 위한 효율적인 수로망이 구축되어 있었습니다. 이 중 일부 수로의 길이는 100m를 넘었으며, 아도비 벽돌로 지어진 집들은 안정성을 높이기 위해 벽의 아래 부분이 위쪽보다 두껍게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이 도시는 오랜 기간 동안 모래에 뒤덮여 있었고, 거의 우기를 겪은 적이 없어 완전히 보존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발굴이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아 수 km에 이르는 벽이 모래 아래에 더 남아있을 것으로 예상되고 있습니다. 미래에 계속해서 발굴 작업이 진행됨에 따라 이 도시와 그 역사에 대한 더 많은 정보가 밝혀질 것으로 기대됩니다. 이 도시는 AD 1000년부터 AD 1470년까지 번영했지만, 잉카족에게 정복당한 역사적인 사실을 갖고 있습니다. 치무족은 고도의 문명을 지니고 있었으며, 전설에 따르면 카누 선단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와 이 지역에 도착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들이 극동이나 폴리네시아에서 왔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이와 유사한 도시는 다른 곳에서 아직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말리(mali), 아를리의 유적지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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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를리 팀북투(Timbuktu) 동북쪽 600km 지점에 위치한 헤로도투스, 플리니우스, 스트라본과 같은 고대 문필가들은 고대에 사하라 사막의 페잔 지역에 살던 가라만테스족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전해왔다. 이 가라만테스족은 전투용 2륜 마차를 타고 다니는 것으로 유명했다. 1932년, 페잔의 한 작은 마을인 제르마 부근에서 말이 끄는 경전투마차가 조각된 암석이 여러 개 발견되었다. 이러한 발견은 헤로도투스의 이야기가 사실임을 뒷받침하는 증거로 여겨진다. 이를 시작으로, 이러한 전투마차를 표현한 그림과 조각들이 조금씩 다른 양식으로 연이어 발견되었다. 아를리, 바위에 새겨진 조각 특히 사하라 사막의 중심인 타실리나제르에서는 많은 양의 발견물이 나왔는데, 이것은 가라만테스족이 이 지역에 집중적으로 살았음을 시사한다. 타실리에서 남쪽으로 1000km 떨어진 아를리에서도 전투마차를 새긴 두 개의 조각이 한 암벽에서 발견되었다. 그렇다면, 가라만테스족은 누구였고 어디에서 왔을까? 가라만테스족과 관련된 가장 오래된 전투마차 그림의 연대는 BC 12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 시기에는 지중해 동쪽 끝에 있는 나라들로 여러 해양민족이 모여들었던 시기였다. 그중에서도 가라만테스족이 함께 있었을 가능성이 있을까? 일부 학자들은 가라만테스족의 후손이 투아레그족으로 알려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들의 역사와 기원은 아직 미스터리로 남아 있으며, 고대의 이 이야기는 그들의 다정한 전쟁 기술과 문화를 살펴보는 데 중요한 흔적을 남겼다.

나미비아(Namibia)의 마크호(壕) 유적지의 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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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미비아(Namibia)의 마크호(壕) 마크호(壕) 벽화, 오른쪽에는 백색의 귀부인이 그려져 있다 빈트훅(Windhoek)에서 서북쪽으로 300km 지점에 위치한 브란트베르크(Brandberg)산 중턱에서는 1917년에 마크란 이름의 기사가 지형조사를 수행 중, 놀라운 발견을 하게 되었다. 이 발견물은 토굴에 그려진 그림이었으며, 여성들이 앞장서 가는 행렬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었다. 이 그림은 지중해 지역의 영향을 받은 것처럼 보이며, 우아한 자세와 몸의 특징은 이집트의 벽화에 나타나는 인물들과 유사한 면이 있었다. 그러나 이 여성들은 남아프리카의 원주민과는 구별되는 특징을 보였다. 이 행렬에서는 '백색의 귀부인'이라 불리는 한 여성이 크게 부각되어 있었다. 그녀는 몸에 착 달라붙는 짧은 바지를 입고 손에 연꽃을 들고 있었다. 그리고 이 여성과 다른 여성들은 활을 들고 있었으며, 손목을 턴투용 장갑으로 보호하고 있었다. 모두 장화를 신고 있었으며, 붉은 머리와 하얀 얼굴 빛을 가진 여성들도 있었다. 이와 유사한 그림이 로디지아에서도 발견되었다. 이를 통해, 침입자나 다른 부족들이 아프리카 북동부에서 남쪽으로 이동한 것으로 보인다. 발견된 고고학적 유물을 토대로 이 그림은 약 BC 50000년경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시기는 이집트의 선사시대와 겹친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이집트인이 옛 리비아의 한 지부족으로 볼 수 있으며, 이와 관련된 리비아족의 다른 지부족이 남쪽으로 이동한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이러한 발견과 이야기는 아프리카 역사와 문화의 복잡성을 엿보이며, 그들의 이동과 상호작용에 대한 흥미로운 퍼즐 조각을 제공한다.

레바논, 바알베크(baalbek)의 신전 유적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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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바논의 바알베크(baalbek) 레바논의 바알베크(baalbek)는 베이루트(Beyrouth) 동쪽 70km 지점에 위치한 곳으로, 거대한 신전들로 유명한 바알베크 성채는 세계에서 가장 웅대한 유적 중 하나로 손꼽힌다. 바알베크, 반듯하게 잘라낸 미스터리한 바위 덩어리 이곳은 로마시대의 성역으로, 주피터 신전과 비너스 신전은 주요한 신들인 바알신과 아스타르테 여신의 신전으로 대체되었다. 이 두 신을 숭상한 종교의식에는 매춘과 주신제와 같은 의식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1759년의 지진으로 인해 바알베크 성채의 대부분이 파괴되었다. 다행히 로마시대의 건축물은 이 지진을 잘 견뎌냈으며, 이러한 건축물에 대한 고고학적 의문은 거의 없다. 그러나 주목할 만한 건축물 중 하나인 "트릴리톤"은 더욱 흥미로운 이야기를 담고 있다. 트릴리톤은 성벽의 일부로, 세 개의 거대한 암석 조각(각각 750t의 무게)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거대한 암석을 어떻게 6.7m 높이까지 들어올린 것일까? 가까운 채석장에는 4mX4m 크기에 길이가 20m이고 무게가 1000t에 달하는 대형 암석도 발견되었다. 이러한 공사는 로마 시대에 진행된 것인가, 아니면 그보다 훨씬 오래 전에 만들어진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남아 있다. 바알베크의 "바알 신전"과 "아스타르테 신전"은 메소포타미아와 나일강 계곡에서 많은 순례자들에게 방문되었으며, 이에 대한 이야기는 구약성서 "열왕기"에도 언급되었다. 바알베크 성채 아래에 있는 지하 통로는 순례자들의 임시 숙박지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고대 아랍 기록에 따르면, '거인족'은 전설적인 '니므롯 국왕'의 명령을 받아 노아의 홍수 이후에 '바알 신전'과 '아스타르테 신전'을 처음으로 건설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러한 전설은 바알베크의 역사와 신성한 의미를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 준다.

요르단의 페트라(Petra)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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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르단, 페트라(Petra) 암벽을 깎아 만든 나바테아인들의 무덤이 들어 있는 사원 요르단의 페트라(Petra), 남서쪽으로 150km 떨어진 메마른 사막 한가운데 자리한 이 도시는 수세기 동안 잊혀져 있었다. 옛 기록에는 페트라에 대한 언급이 있었지만, 그 위치 또한 다른 많은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잊혀져 있었다. 그러던 중 1812년, 스위스 탐험가인 ‘요한 루트비히 부르크하르트 (Johann Ludwig Burckhardt, 1784년 11월 20일 ~ 1817년 10월 15일)’가 현지 안내자의 도움을 받아 좁고 깊은 골짜기를 통과한 끝에 웅장한 유적을 발견한다. 이 유적은 헬리니즘 양식의 건물로 생각되는데, 큰 암벽을 파서 건설된 것이었다. 이 건물의 정면에는 문들이 있었고, 이 문을 통해 복도로 들어가면 바위 속에 파여진 방들이 나타났다. 이 방들은 대부분이 비어 있었으나, 그 중에는 계단이 있는 방도 있었다. 이 탐험가가 발견한 유적지가 곧 페트라의 유적이라는 것이 밝혀낸다. 영국의 시인인 ‘존 윌리엄 버곤 (John William Burgon , 1813년 8월 21일 – 1888년 8월 4일)’ 신부는 페트라를 "장미빛 같은 붉은 도시-영원한 시간의 절반만큼 오래된" 도시로 묘사했는데, 이는 페트라의 아름다움을 감상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나바테아인들은 성스러운 장소를 산꼭대기에 건설했으며, 바위를 깎아 계단을 만들어 이곳까지 올라갈 수 있도록 했다. 이 성스러운 장소에는 14m X 6m 크기의 제단이 있었고, 원래는 황금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제단 위에는 4계단이 있고, 사암대가 튀어나와 있어 제물을 바친 곳으로 추정되었다. 로마의 통치로 인해 나바테아인들의 독립은 종말을 맞이했지만, 대상들의 통행로 변경 전까지 페트라는 번영을 유지했다. 그러나 대상들의 발길이 끊기면서 페트라의 번영은 점차 감소하고, 외부의 침입과 약탈을 겪으며 결국 잊혀진 존재가 되었다. 이 도시의 바위로 파여진 방들이 무덤이 아

이탈리아의 시바리스(Sybaris)와 발 카모니카(Val camonica) 유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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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의 시바리스(Sybaris) 시바리스의 극장 유적 이탈리아의 시바리스(Sybaris)는 BC 7세기에 이탈리아 칸타브리아 주 북쪽 100km 지점에 위치한 도시로 알려져 있다. 시바리스는 그 시기에 재물이 풍부하고 주민들이 사치와 향락을 즐기는 것으로 유명했다. 이 도시에서 비롯된 '시버라이트(sybarite)'라는 용어는 사치와 향락을 즐기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기도 했다. 그러나 시바리스는 물 아래로 사라져 전설 속으로 사라졌다. 이후 펜실베이니아 대학에서 시바리스가 원래 위치했던 타란토 지역을 조사한 결과, 진흙 속에 깊이 6m 정도에 걸쳐 묻혀있는 건조물을 발견했다. 이 건물들은 분명한 시바리스의 유적으로 확인되었다. 시바리스의 동전 이 유적을 발굴하는 것은 막대한 비용이 들 것으로 예상되지만, 고대 시바리스가 아테네와 견줄 만한 중요한 도시로 평가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감안하면, 이 도시에는 많은 사원과 보물이 숨어 있을 가능성이 있다. 이들을 찾아내면 발굴 비용을 상쇄할 만한 가치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탈리아의 발 카모니카(Val camonica) 이탈리아의 발 카모니카(Val Camonica)는 밀라노(Milano) 동북쪽 100km 지점에 위치한 고요한 계곡으로, 이 곳에는 약 15,000개의 오래된 바위 조각 그림들이 새겨져 있다. 이러한 조각들은 고대 시대의 주거 형태, 종교 의식, 농경 방식, 그리고 다양한 일상 생활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발 카모니카 지역은 그림이 아닌 바위 아래에도 다수의 그림이 조각되어 있는 것을 발견한 곳으로, 이러한 그림들은 신석기 시대부터 BC 16년까지 약 6,000년 동안의 역사를 담고 있다. 발카모니카의 암각화 초기 조각들은 프랑스 베고(Bégo)산에서 발견된 조각들과 유사한 양상을 보이며, 이로 인해 베고산에서 추방된 사람들이 발 카모니카 지역으로 이주하며 이러한 그림을 남긴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발 카모니카 지역의 주민들은 현지 주민

이탈리아 사르데냐(Sardinia)의 유적지, 누 라게(nurag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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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의 사르데냐(Sardinia) 사르데냐 지역에는 청동기시대 초기의 흔적으로 보이는, 돌을 쌓아 만든 ‘누 라게(nuraghe)’라고 불리는 건조물이 약 7000개나 존재한다. 이들 건조물 중 가장 오래된 것은 탑과 같은 형태를 띠며, 좁은 통로를 통해 내부로 들어갈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석판을 쌓아 만든 지붕을 갖춘 ‘누 라게’도 있고, 여러 개의 탑이 통로로 연결되어 복잡한 구조를 이루는 ‘누 라게’도 있다. 누라게 (nuraghe) 이러한 건조물들은 처음에는 사원으로 여겨졌으나 현재에 이르러서는 이 지역의 주민들이 비상 시에 피신하기 위한 요새로서 사용된 것으로 밝혀졌다. 이 ‘누 라게’들은 모두 서로를 보도록 배치되어 있어서 망을 통해 시야를 맞대고 있는 사람들이 연기 신호 등을 이용하여 서로와 연락할 수 있었다. 이런 방식의 방어망은 사르디니아섬을 외부의 침략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구축된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한 가지 의문점은 적의 위협이 큰 해안보다는 내륙 지역에 이러한 ‘누 라게’들이 더 많이 위치해 있는 사실이다. 옛 카르타고 사람들은 이 지역에 상륙하여 가장 큰 누라게 내에 정착했으나, 나중에는 로마 사람들에게 쫓겨나게 되었다.

이탈리아의 '모데나'와 '성 베드로 대성당'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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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의 모데나(Modena) 이탈리아의 모데나 지역은 포계곡에 위치한 곳으로, 최근에 이 지역 주변을 공중에서 촬영한 결과 건조물들이 발견되었다. 이 건조물들은 땅 위에서 보이는 윤곽으로 보아 담으로 둘러싸인 원형 극장으로 추측된다. 모데나 부근에서는 청동기 시대의 보석들이 발굴되었으며, 로마 이전 시대의 묘지들도 발견되었다. 이탈리아의 알프스 산맥과 아펜니노 산맥 사이에 위치한 이 지역은 선사시대 문화의 중심지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이로 인해 한 때 이곳에 도시가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다. 로마 시대인 1세기에 활동한 문필가 대 플리니우스는 그의 저서인 "박물지"에서 포계곡 지역에 번성한 도시로 '오테시움'이라는 이름을 언급하고 있다. 이탈리아의 성 베드로 대성당 성 베드로 대성전(라틴어: Basilica Sancti Petri, 이탈리아어: Basilica di San Pietro in Vaticano) 혹은 성 베드로 대성당, 바티칸 대성전(Basilica Vaticana) 이탈리아의 성 베드로 대성당 외경 이탈리아의 바티칸 시티에 위치한 성베드로 대성당은 AD 1세기의 역사와 전설에 따르면 성베드로 사도의 몸이 안장된 곳으로 알려져 있다. 고문을 받은 뒤 성베드로의 시신은 네로의 정원 근처에 묻혔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 후, 콘스탄티누스대제는 현재의 대성당이 세워진 장소에 성당을 건설했다. 그러나 네로의 정원은 이 위치와는 더 멀리 떨어져 있다. 최근의 조사 결과, 그 근처에 있는 공동묘지에서는 중심에 있는 무덤이 비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성 베드로 대성당 내부 교황 비오 12세는 1939년에 성베드로 대성당 아래를 발굴하도록 지시하였으며, 이 작업으로 인해 콘스탄티누스대제 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붉은 벽 밑 바닥에서 황금색과 자색 천 부스러기에 싸인 남성 노인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시신 주변의 흙은 네로의 정원 근처 공동묘지의 텅빈 무덤 주변의 흙과 유사하게 분석되었다.